마쓰다이라 사다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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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사다키요는 에도 시대 중기의 다이묘이다. 마쓰야마 신덴 번의 번주였으며, 이후 이요 마쓰야마 번의 번주가 되었다. 1729년에 태어나 1779년에 사망했다. 사다키요는 번 재정의 어려움 속에서 개혁을 시도했으나, 사망으로 인해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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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사다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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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마쓰다이라 사다키요 |
시대 | 에도 시대 중기 |
출생 | 교호 14년 윤9월 23일 (1729년11월 13일) |
사망 | 안에이 8년 7월 14일 (1779년8월 25일) |
개명 | 미나모토노스케 (어린 시절 이름), 사다키요 |
시호 | 다이가쿠인덴 종사위 습유보궐 고은주 준요 간게쓰 고엔대거사 |
관위 | 종5위하빗추노카미, 오키노카미, 종4위하시종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시게 → 도쿠가와 이에하루 |
번 | 이요 마쓰야마신덴 번 번주, 이요 마쓰야마 번 번주 |
씨족 |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사다카쓰 계통 |
부모 | 아버지: 마쓰다이라 사다아키라, 어머니: 호코인덴 양아버지: 마쓰다이라 사다카쓰 |
형제자매 | 사다키요, 사다노리, 미즈노 다다히로 정실, 미조구치 나오히로 정실 |
배우자 | 정실: 오다 노리카타의 딸 |
자녀 | 쓰네기미, 고토기미, 소노기미, 야쓰기미 양자: 마쓰다이라 사다쿠니 |
2. 생애
교호 14년(1729년) 마쓰야마 신덴 번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아키의 장남으로 태어나, 엔쿄 4년(1747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마쓰야마 신덴 번 1만 석을 상속받아 번주가 되었다.
메이와 2년(1765년), 사촌이자 마쓰야마 번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사다카쓰가 후사 없이 급사하자 그의 뒤를 이어 마쓰야마 번주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 다스리던 신덴 번 1만 석 영지는 막부에 반납되었고, 마쓰야마 신덴 번은 소멸하였다. 같은 해 관직이 壱岐守|이키노카미일본어로 변경되었다.
장남 구마타로가 메이와 3년(1766년) 4세로 요절하자, 메이와 5년(1768년) 막부의 명으로 다야스 무네타케의 여섯째 아들 도요마루를 양자로 맞이하여 사다쿠니로 이름을 고쳤다.
번주로서 메이와 7년(1770년) 고모모조노 천황 즉위 축하 사절로 임명되어 교토를 방문하고 시종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격식 높은 타마리노마즈메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마쓰야마 성 아래의 화재와 타마리노마즈메 임명 등으로 번의 재정이 악화되자, 번사들의 봉록 삭감, 검약 강조, 교호 대기근 희생 농민 사쿠베를 義農|기노일본어(의로운 농민)로 칭송하며 비석 건립 등의 정책을 시행했다.
안에이 7년(1778년) 유학자 아사야마 뭇사이를 등용하여 번정 개혁을 시도했으나, 이듬해인 안에이 8년(1779년) 7월 14일 에도의 번 저택에서 51세로 병사했다. 그의 죽음으로 마쓰다이라 사다카쓰로부터 이어진 남계 혈통은 단절되었고, 시작된 번정 개혁도 좌절되었다. 유해는 에도 미타의 사이카이 사에 매장되었고, 머리카락은 마쓰야마 다이린사로 보내졌다.
2. 1. 출생과 가계
교호 14년(1729년) 윤 9월 23일, 마쓰야마 신덴 번 초대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사다아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측실 호코인(마쓰모토 씨의 딸)이다. 어릴 적 이름은 겐노스케였다.종가 번주인 마쓰다이라 사다카쓰와는 사촌 관계이다.
2. 2. 마쓰야마 신덴 번주 시절
엔쿄 4년(1747년), 아버지 마쓰다이라 사다아키가 사망하자 그의 영지인 松山新田藩|마쓰야마 신덴 한일본어 1만 석을 상속받아 번주가 되었다. 같은 해, 종5위하 빈추노카미에 서임되었다.메이와 2년(1765년), 사촌이자 마쓰야마 번의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사다카쓰가 갑작스러운 병으로 쓰러지자 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다음 날 가독을 이어받아 마쓰야마 번주가 되었다. 이에 따라 그가 다스리던 마쓰야마 신덴 번의 영지 1만 석은 마쓰야마 번에 편입되지 않고 막부에 반납되었으며, 마쓰야마 신덴 번은 폐지되었다.
2. 3. 이요 마쓰야마 번주 상속
엔쿄 4년(1747년), 아버지 사다아키가 사망하면서 유령(幽霊) 마쓰야마 신덴 번 1만 석을 상속받았다. 같은 해, 종5위하 빈추노카미(備中守)에 서임되었다.메이와 2년(1765년), 사촌이자 마쓰야마 번의 종가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사다카쓰가 갑자기 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로 지명되어 다음 날 종가를 계승했다. 이때, 기존에 다스리던 신덴 번의 1만 석 영지는 마쓰야마 번에 합쳐지지 않고 막부에 반납되었으며, 이로 인해 마쓰야마 신덴 번은 소멸하였다. 같은 해, 관직이 이키노카미(壱岐守)로 변경되었다.
2. 4. 번정 개혁 시도와 좌절
메이와 2년(1765년) 사촌 마쓰다이라 사다카쓰의 급사로 그의 뒤를 이어 종가를 계승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 다스리던 마쓰야마 신덴 번 1만 석 영지는 막부에 반납되어 소멸하였다.종가를 이은 후, 메이와 7년(1770년)에는 고모모조노 천황 즉위를 축하하는 어사로 임명되어 교토에서 천황을 알현하고 시종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마쓰야마 성 아래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성 아랫마을 상당 부분이 소실되는 피해를 겪었다. 다음 해에는 양조부 마쓰다이라 사다타카에 이어 격식 높은 타마리노마즈메 직책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번의 격을 높이는 일이었으나 동시에 막대한 비용 부담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요인들로 마쓰야마 번의 재정은 심각한 압박을 받게 되었다. 사다키요는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여러 차례 번사들의 봉록을 삭감하고,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교호 대기근 당시 희생된 마사키정 쓰쓰이 촌의 농민 사쿠베를 '의로운 농민'(義農|기노일본어)으로 칭송하며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을 세워 민심을 수습하고 농업을 장려하고자 했다.
안에이 7년(1778년)에는 유학자 아사야마 뭇사이를 등용하여 본격적인 번정 개혁에 착수했다. 뭇사이는 문무(文武)를 장려하고, 검약을 철저히 지키며,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을 목표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안에이 8년(1779년) 7월 10일, 사다키요는 갑작스럽게 병을 얻었고, 나흘 뒤인 7월 14일 에도 번 저택에서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으로 마쓰다이라 사다카쓰로부터 이어져 온 남계 혈통은 단절되었으며, 야심 차게 시작된 번정 개혁 역시 큰 위기를 맞았다. 뭇사이는 뒤를 이은 양자 마쓰다이라 사다쿠니에게 계속 중용되어 개혁을 이어가려 했으나, 보수적인 다른 번사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결국 개혁은 좌절되고 말았다.
2. 5. 사망
안에이 7년(1778년)에 유학자인 아사야마 뭇사이에게 번정 개혁을 맡겼고, 뭇사이는 문무 장려, 검약의 엄수, 기강의 숙정, 민심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다. 그러나 안에이 8년(1779년) 7월 10일, 갑자기 병을 얻어 같은 달 14일에 에도 마쓰야마 번 저택 아타고시타 카미야시키에서 사망했다. 향년 51세였다. 사다키요의 죽음으로 마쓰다이라 사다카쓰 이래의 남자 계통 혈통은 단절되었다.유해는 에도 미타의 사이카이 사에 매장되었다. 유발(遺髮, 머리카락)은 미타 사이카이 사찰에서 출발하여 기소지를 거쳐 마쓰야마 다이린사에 보내져 법요가 거행되었다. 한편, 아사야마 뭇사이는 뒤를 이은 사다쿠니에게 측근으로 기용되어 계속해서 개혁을 추진하려 했지만, 다른 번사들의 반발을 사서 개혁은 좌절되었다.
3. 계보
- 아버지: 마쓰다이라 사다아키 (1700년 ~ 1747년)
- 어머니: 호코인덴 (마쓰모토 씨)
- 양아버지: 마쓰다이라 사다카타 (1733년 ~ 1765년)
- 정실: 쿄쿠센인 (오다 노부카타의 딸)
- 자녀 (생모 불명)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장녀 | 츠네키미 | 1756년 ~ 1802년 | 마쓰다이라 사다야스의 정실 |
장남 | 사다야스 | 1757년 ~ 1762년 | 요절 |
차녀 | 코토키미 | 1760년 ~ 1807년 | 마쓰다이라 노부미치의 정실 |
차남 | 쿠마타로 | 1763년 ~ 1766년 | 요절 |
삼녀 | 소노키미 | 1764년 ~ 1802년 | 오타 스케타케의 정실 |
사녀 | 료키미 | 1767년 ~ 1768년 | 요절 |
삼남 | 이세마쓰 | 1769년 ~ 1769년 | 요절 |
오녀 | 타키키미 | 1773년 ~ 1773년 | 요절 |
육녀 | 야츠키미 | 1774년 ~ 1792년 | 아키모토 오사토모의 정실 |
사남 | 코마마루 | 1776년 ~ 1777년 | 요절 |
칠녀 | 미야비키미 | 1777년 ~ 1789년 | 요절 |
- 양자
- * 마쓰다이라 사다쿠니 (1757년 ~ 1804년) - 타야스 무네타케의 여섯째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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